| 모리타 다카시 씨의 진술서 나는 1924년 3월 2일 히로시마현 사고다테 마을에서 태어났다. 1944년 11월 징집영장을 받아 징병되어 1945년 1월 도쿄 나까노 헌병학교에 입학, 8월 1일에는 육군헌병중국헌병대 사령부에 배치되어 원하던 히로시마에 부임되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부대와 함께 요꼬가와의 전차다리를 건너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금까지 본적이 없었던 맹렬한 섬광을 느끼고, 4-5미터 정도 날아가 후배부에 전신화상을 입었다. 나중에 안 일인데, 박심지로부터 1.3킬로 떨어진 곳에서 피폭한 것이다. 그 후 오후 2시경 소세이다리 서쪽에서 조선의 이공전하(일본명 가네미츠 참모)가 부상한 것을 발견하고 우지나에 있는 병원에 모시고 갔다. 8월 6일 밤부터 7일 8일, 헌병사령부에서의 임무를 수행했는데 8월 9일에는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오오노우라 소학교를 이용하여 만든 임시육군병원에 입원했다. 곽귀훈씨도 그 당시 같은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그후 11월 고향에 돌아가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 부모님은 이전에 북미에 일하러 가 계셔서 1922년 귀국하셨다. 나는 1946년에 같이 히로시마에서 피폭한 아내 아야꼬와 결혼했다. 이듬애 백혈구가 증가하여 심한 오한을 느끼고 원폭 브라브라 병이라는 증세가 나와 원폭증임을 자각했다. 당시 나는 시계수리업과 재봉틀 판매를 해서 생계를 엮어가고 있었다. 1955년 재봉틀을 사러온 손님중에 브라질로부터 귀국한 사람이 있어서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 사람이 다시 브라질에 가게되어 나도 함께 브라질에 가자고 권해왔다. 나는 브라질에 갈 결심을 하고 두 아이들을 데리고 1956년에 브라질을 향했다. 이주는 어디까지나 농업이민이란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의사로부터 피폭한 내 몸은 농업을 할 수 없다고 들어서 상파울로에서 시계상으로 일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은 너무나도 두꺼웠고, 시계판매도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아 제1회 이민으로 온 일본인을 위한 봉사자로서 일하기도 했다. 브리질에 가서는 여하튼 생활이 어렵고 굉장히 가난했다. 또 아이들 결혼에 방해가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하여 나는 피폭자인 사실을 공언하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1983년경 일본계2세였던 여의사가 히로시마에 가서 피폭자치료 연수를 1주간 받고왔다고 해서 브라질 재주 피폭자를 검진해주었다. 당시 내 아이들은 결혼하고 있었고 우리 부부도 피폭문제에 연계를 두고 있어서 브라질의 히로시마현민회를 통해 검진받을 것을 호소했다. 1984년 일백마이니찌신문에“피폭자여 나와라, 연금제도가 살아있다”는 기사가 나와 일본에 특별처치법에 의한 연금제도(건강관리수당)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금새 영사관에 신문을 가져가서 문의했으나 영사관 사람은 그런 제도를 전혀 모른다고 했다. 그 밖에도 문의가 쇄도하여 영사관은 혼란해있었지만 영사관의 태도는 피폭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 있느냐고 말할 뿐이었다. 거기서 나는 전문의로부터 피폭자로서 인정을 받았고 건강관리수당을 수급받으려면 피폭자가 단결하여 운동할 필요가 있음을 통감했다. 그리하여 1984년 6월에 우리 부부가 신문을 통해 피폭자의 모임을 알리고 해외거주자에게 일본국내거주자와 같은 법의 적용을 요구하여 같은해 7월 15일 재 브라질 피폭자협회를 27명이서 결성했다. 나는 1984년 9월에 일본정부,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나가사끼현, 나가사끼시 등에 신청을 하기 위해 브라질 이민 후 처음으로 귀국했다. 그때 나는 히로시마시에서 피폭자 건강수첩을 취득했다. 후생성에 가서 브라질의 피폭자의 원호를 신청했을 때에는 후생성직원으로부터“일본을 떠난 사람에게는 지급할 수 없다. 세금을 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브라질에 부탁하면 어떤가”하는 말을 들었던 것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이민이란‘기민’이란 생각이 들어, 해외이주하지 않았으면 좋았을것을 하고 낙담하였다. 그러나 북미에는 의사단이 파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미의 피폭장게도 의사단을 파견해줄것을 후생성에 청원하였다. 또 외무성에 가서 安倍晋太郞외무대사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브라질에 돌아와서 安倍외상이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 남미재주피폭자를 위해 의사단을 파견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말대로 1985년 10월 21일에 제1회 의사단 파견이 실현되었다. 이듬해에도 의사단이 파견되어 그때부터는 2년에 한번씩 북미의 진단과 번갈아 파견되었다. 1986년에 나는 건강관리수첩의 지급을 받고 있던 은행계좌에 입금이 되지 않은 것을 알고 히로시마시 원폭피해대책과에 문의했더니 출국했기 때문에 지급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1998년 가을에는 히로시마현의 직원이 갑자기 건강관리수당을 너무 많이 지급했으니까 반환수속의 서류에 서명 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건강관리수당이 지급되던 통장을 히로시마의 동생에게 맡기고 있어서 본적도 없고 일본에서 출국해도 피폭자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나도 당황하였다. 재브라질 피폭자협회의 회원은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국적 보유자이다. 의사단의 파견만으로는 멀리서 진단을 받으러 오는 사람에게는 부담이 크고, 경우에 따라서는 교통비가 없어서 진단을 받으러 올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브라질에 있는 피폭자는 생활에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본정부는 재 남미 피폭자의 실태등에 관한 조사를 전혀 해주지 않는다. 쇼와에 태어난 피폭자에게 있어서 여생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 최후의 한명이 될 때까지 일본의 전문의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브라질에 피폭자를 위한 의사단이 왔을 때 함께온 후생성 과장보좌는 히로시마현인회의 회장에게“여기까지 해주면 과분하지 않아요. 얼마 안 있으면 피폭자도 다 죽을 텐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런 말언을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
| 구라모토 히로시 씨의 진술서 나는 1926년 하와이 호놀루루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대에 히로시마에서 하와이로 이민을 왔다고 한다. 1931년 내가 다섯 살때 할아버지가 병으로 몸져 누우셔서 간병을 위해 어머니, 형, 나, 동생이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전쟁이 터져 아버지도 일본으로 돌아오셨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던 날, 나는 야마구치현 고오시의 해군공창으로 일을 하던 중 8월 7일 특별한 폭탄이 투하되어 히로시마가 전멸했다는 뉴스를 듣고, 다음 날 아침, 고오시를 출발하여 히로시마에 갔다. 히로시마 시내는 타죽은 시체가 여기저기 누워있었고 마치 지옥처럼 보였다. 우리집은 다 타있었고, 거기 어머니와 두 동생이 작은 거적집을 만들고 있었다. 아버지는 행방불명이라고 했다. 나느 그 후 한달간 히로시마를 샅샅이 뒤져 아버지를 찾아보았지만 결국 만날 수 없었다. 그후, 나는 히로시마시의 부흥국에서 일했으나, 집이 다 타서 없어졌고, 아버지도 없는 생활은 너무나도 힘겨운 날들이었다. 그런 생활을 보내던 중 1948년 경 미국대통령으로부터 내게 편지가 한 장 도착했다. 내가 미국국적을 가지고 있으니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나와 동생은 미국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당시 숙부부부가 살고 있었고, 우리를 불러주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에 커다란 희망을 안고 건너갔지만, 일본인수용소에서 나온지 얼마 안되는 숙부 가족의 생활은 가난했고, 미국에서의 우리의 생활은 매우 고생스러운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원폭피해를 입은 후 미국에 온 일본인이 많이 있었지만, 피폭자간의 상호교류는 거의 없었다. 일본의 적국이었던 미국에서 자신들이 피폭자라고 고백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미국에서는 원폭을 투하했기 때문에 전쟁이 빨리 끝났다는 생각이 없어서 원폭은 정의의 폭탄이라고 전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우너폭으로 비참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곤란하기만 했다. 미국 피폭자간의 상호교류가 없던 상태에서 1965년 로스엔젤리스에서 피폭자 30여명이 처음으로 회합을 갖고 피폭자간의 친목을 다지는‘원폭우회(原爆友の會)’가 생겼다. 1971년에는 로스엔젤리스에서 재 미원폭피해자협회가 설립되었다. 1972년경 나도 샌프란시스코에서도 피폭자협회를 설립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 시절에는 자신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다른 피폭자를 위해서 해보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다. 나는 히로시마 시에 들어갔기 때문에 피폭을 당한 사람이지만, 원폭투하 당시 히로시마에 있다가 직접적으로 피폭한 사람들로 더 어렵고 불쌍한 피폭자가 많이 있어서 그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74년에 샌프란시스코에 북가피폭자협회를 설립, 회장에 취임했다. 1976년에 로스엔젤리스의 북가피폭자협회와 합동으로 전미조직인‘재미원폭피해자협회’가 설립되어, 내가 제3대 회장에 취임했다. 미국에서는 1976년경부터‘원폭우회’와‘재미원폭피폭자협회’의 회장과 간부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후생성과 외무성을 찾아가‘피폭자건강수첩교부의 간소화, 즉 미국의 일본영사관을 통해 수첩을 교부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일’‘히로시마 의사단을 파견할 것’을 탄원했다. 미국의 피폭자 중에는 이른 시기부터 일본에 가서 수첩교부를 받은 사람이 있었서 이런 요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1974년에 북가피폭자협회의 회장이 되었을 때 샌프란시스코의 마에다총영사를 통해 후생성에‘수첩교부의 간소화’와‘의사단파견’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보냈는데, 이듬해 1975년 6월에 온 편지는“수첩발행은 법률에 의해 실시하고 있어서 간소화할 수 없다. 전문의의 파견은 일미간의 의사면허의 문제임으로 곤란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후 관계자가 힘써 주어서 1977년 히로시마현 의사단의 도미진단이 개시되어 2년에 한번 씩 진단을 받게되어 오늘날에 달았다. 재미피폭자는 이른 시기에 일본에 가서 피폭자건강수첩의 교부를 받았었는데, 1974년 손진두 제1심 판결이전에는 일본국적이 있는 사람에게만 제한되어 있었다고 한다. 나는 1972년에 수첩교부신청을 하여 거부받은 사람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이 1974년 신청을 했더니 수첩을 교부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은 미국국적의 피폭자였다. 이후 재미피폭자도 많은 사람이 일본에 귀국하여 수첩의 교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1975년 처음으로 피폭자건강수첩을 신청했다. 그 때 히로시마현의 담당관에게 이전에 신청을 해도 교부받지 못했는데 왜 교부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손진두 판결에서 방침이 변했다고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 때까지 손진두 재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1974년의 손진두판결은 재미피폭자에게도 대단히 큰 영향을 주었던 판결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수첩을 교부받았을 때는 히로시마시로부너 수첩이 미국에 돌아가면 무효가 된다는 설명도 없었고, 건강관리수당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음으로, 수당의 신청은 하지 않았다. 건강관리수당을 받는 재미피폭자가 증가하게 된 것은 1983년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는 것이 시작되고부터로, 미국에 귀국한 후에도 건강관리수당의 지급을 받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가사끼에서 덴버에, 또 히로시마시로부터 캐나다에 간 피폭자로 수당의 반환을 청구받고 있는 사람을 예로 들었으나,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나는 재미피폭자협회의 회장으로서 여러번 후생성과 교섭을 해왔으나, 1990년 재한피폭자에 대한 인도지원 40억엔의 처출이 결정된 후 후생성에 의사단의 파견에 의한 진단뿐 아니라 재미피폭자를 위한 치료시설을 설치해 달라고 교섭을 한 적이 있다. 그러자, 담당관은“한국과 같이 하지 말아달라”“한국에는 수만명의 피폭자가 있어서 어렵게된다”고 말하였다. 이렇듯 교섭할 때마다 한국의 피폭자를 끄집어내서 우리를 협박하듯이 요구를 배척하는 것이 후생성의 수단이었다. 일본국적으로 일본에 있는 피폭자, 일본국적으로 일본밖에 있는 피폭자, 일본국적이 아닌 피폭자, 모두 피폭자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게 혐오스런 폭탄에 상처입고, 현재까지 고통을 받고 있는 슬픈 운명의 피폭자인 것이다. 그러니, 부탁이니 모두가 똑같은 대우를 받게 해주십시오. 그것이“원자폭탄 투하의 결과로 생긴 방사선에서 기인한 건강피해가 다른 전쟁피해과 다른 특수한 피해라는 증거이고, 고령화가 진행되는 피폭자의 보건, 의료 및 복지에 대한 종합적인 원호대책을 마련하고, 그와 동시에 국가로서 원폭투하에 의한 사몰자의 귀중한 희생을 명기하기 위해 이 법률를 제정한다”고 한 피폭자원호법의 취지가 아니겠습니까. |